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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135   조회수: 1438   작성일자: 2014/08/19 21:33:19  
    제목 스페인 역사 II
    작성자 관리자 (madridhanin@gmail.com)


국토 수복 전쟁 (Reconquista)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 머무르던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국토 수복 전쟁 기간이다. 또한, 스페인의 중세를 구성하는 이시기는 무어인에 대항한 전쟁 시기이자 기독교 왕국들 사이에 주도권 쟁탈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 지방을 거점으로 저항군을 형성한 서고트 왕가의 귀족들은 펠라요(Pelayo,718-737)를 왕으로 하여 코바동가 전투에서 무어 군대를 격파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반도 내의 여러그리스도교 왕국들이 연합하여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스페인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15세기 국토 수복전쟁 막바지에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이던 까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이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과 혼인을 하여 정치적인 통일을 이루고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국토수복전쟁의 종지부를 찍는다.

이 전쟁은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 모두에게 큰 의미를 주었으며, 민족의식이 희박했던 스페인은 그 정체성이 확고해지기 시작되었다. 국토 수복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구심점이 된 것은 톨릭 신앙이으며 9세기 초 갈리시아 지방에서 예수의 제자인 성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국토 수복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간의 벌어진 최초의 문명 간의 충돌로서 스페인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지키는 보루 역을 하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을 파견할 때에 스페인은 군대를 보내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들 역시 이슬람교에 맞서 싸우고 있는 서방의 십자군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기사 시대 국토 수복 전쟁에 등장하는 영웅으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엘시드 장군(1043-1099)이다.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국토수복전쟁에서 승리한 이사벨 가톨릭 여왕은 1492 년 10월 12일 신대륙을 위해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항해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지원하여 신대륙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고, 동시에 국외 식민지 건설을 계획하여 스페인 제국의 막대한 발전을 위해서 그 당시에 논란과 위험성이 분분했던 콜럼버스의 제안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게 된다. 당시 아시아로 통하는 육로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막혀져 있었고 아프리카 해안을 통해 인도행 항로 역시 포르투갈에 선점당한 상태였다. 인도 신대륙을 찾아 떠난 콜럼버스는대서양을 가로질러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여 중남미의 엄청난 금과 은을 스페인에 유입하면서 자본주의의 토대를 갖추고 산업혁명의 촉매 역할을 하면서 신대륙에 식민지를 가진 16세기 유럽 최대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1504년 이사벨 가톨릭 여왕이 사망 후, 왕위를 계승한 까를로스 1세(이사벨 가톨릭 여왕의 외손자이자, 독일 황제의 손자)가 즉위하여 스페인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시대가 시작된다. 까를로스 1세와 그의 아들 펠리뻬 2세(재위:1556-1598) 시절 스페인은 지리적,군사적, 언어적 통일을 이루었고 대외적으로는 나폴리, 시실리, 네덜란드,북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필리핀 등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명실상부한“해가 지지 않은 제국”을 이륙하였다.

펠리페 2세는 독실한 신앙으로 가톨릭 교회와 힘을 모아 이슬람 세력과 북부 유럽의 개신교 세력으로부터 제국을 수호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이어졌다. 1561년 제국의 천 수도였던 똘레도에서 신도시인 마드리드로 천도를 단행했으며 1571년 레빤토 해전에서 아랍함대를 격파하여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했고 1580년에는 포르투갈을 합병하여 스페인 제국의 전성시대를 이루게 한다.


무적함대의 패배와 제국의 몰락

펠리뻬 2세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인 펠리뻬3세, 펠리뻬 4세, 그리고 까를로스 2세 등 합스부르크 가문의 국왕들은 무리한 영토확장과 선조 물려준 거대한 제국을 유지할 능력 부족의 무능한 정책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유럽 각국이 스페인을 집중적으로 견제하는 와중에 네덜란드가 반란을 일으켰고 1640년 까달루냐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같은해 포루투갈이 독립을 선언했다.

군사적 패배도 이어져서,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군에게 무릎을 꿇고, 1643년에는 스페인의 보병연대가 로크로아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하여 국제무대에서 프랑스에 상석을 내주어야 했다. 신구교도들 간의30년 종교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은(1648) 유럽에서 스페인의 군사적 지배의 종말을 의미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무능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국왕들과 정치가들의 부패로 스페인은 몰락의 길을 들어서게 된다. 까를로스 2세(1661-1699)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이 사망하자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 사이에 왕의 계승 전쟁(1700-1713)이 벌어진다. 결국,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뒤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이 펠리뻬 5세(1700-1746)로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가의 절대 군주제가 국가 권력을 좌우하게 된다. 까를로스 3세(1759-1788)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계몽 군주로서 강력한 전제 정치를 실행하고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등 스페인 근대화에 중점을 두었다.


나폴레옹에 대항한 독립전쟁

까를로스 4세(1788-1808)는 프랑스 대혁명(1789)의 자유주의 사상에 경계심을 가져 선왕이 추진해온 정책을 중단하고, 부패한 재상 고도이(1767-1851)를 등용하여 절대주의 체제로 역행하였다. 고도이는 포르투갈을 공격하기 위해 길을 열어달라는 나폴레옹의 요구를 들어주는 비밀 협약을 1807년에 체결하였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어기고 이듬해 스페인을 점령해 버리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마드리드 시민에 의해 까를로스 4세가 물러나고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1808,1814-1833)가 왕위에 즉위하였으나 나폴레옹의 압력으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자 마드리드 시민을 중심으로 프랑스군에 맞서는 독립전쟁(1808-1814)이 전개되었고 1814년 스페인-영국 연합국에 의해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물러나자 페르난도 7세는 다시 왕위에 복귀할 수 있었다.

페르난도 7세가 사망 후 그의 어린 딸 이사벨 2세와 그의 동생인 까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1788-1855) 사이 왕권을 주장하며 까를로스 전쟁과 두 차례의 반란으로 스페인 정치 상황은 불안정했다. 그러나 1843년 이사벨 여왕이 성년으로 인정되면서 이사벨 2세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 기간에 신흥 부르주아가 형성되며 주요 세력이 자리를 잡고 1845년 자유주의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868년 또페테 장군에 의한 공화당 혁명이 일어나왕당파 군대를 격파하였고 여왕이 망명하면서 왕정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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