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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137   조회수: 1388   작성일자: 2014/08/19 21:55:42  
    제목 투우와 플라멩꼬
    작성자 관리자 (madridhanin@gmail.com)


투우와 플라멩꼬 : 스페인 관광 상품의 대표적 아이콘

외국인들이 흔히 스페인을 ‘정열의 나라’ 라고 부르는 데에는 투우와 플라멩꼬의 이미지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우람한 황소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버리는 투우사의 과감하고 날랜 동작에서 한 때 전 세계를 제패했던 스페인 사람들의용맹과 기백을 엿볼 수 있으며 무아지경에 이른 플라멩꼬 무희의 격정적인 리듬에서 우수에 찬 스페인적 열정을 느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국인들의 눈에 투우와 플라멩꼬가 스페인을 대표하는 국기와 전통춤으로 비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스페인 사람들은 이러한 이미지가 지역별로 고유의 전통이 존재하는 스페인의 다양성을 확일화 시키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이는 워싱턴 어빙을 비롯한 19세기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소위 ‘축제의 스페인’의 상징일뿐, 오늘날의 선진화된 스페인을 나타내는 대외적인 표상으로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고도 생각한다. 실제로 스페인에는 아라곤 지방의 ‘호따’나 까딸루냐의 ‘사르다나’ 등 지역마다 고유의 전통음악과 춤이 존재하고 있으며 굳이 따지자면 플라멩꼬는 남부 안달루시아의 지방색을 벗어나지 못한다.

투우 또한 스페인 중앙정부로부터 의식적으로 멀어지고자 하는 지방에서는 상대적으로 대중적, 문화적 인지도가 떨어짐을 알 수 있다. 2006년 12월18일자 스페인의 유력 일간지 ‘엘 빠이스’에 의하면 전체 응답자의 72.3%가 투우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응답하였는데, 이 비율은 까딸루냐에서는 81%로 올라가고 있다.
스페인 중남부 지방의 고속도로나 국도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소 입간판이 북부 까딸루냐나 바스크 지방의 도로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으며 2004년 4월 바르셀로나 시에서 투우경기를 금지하는 조례를 통과시킨 사실 등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투우와 플라멩꼬가 이처럼 스페인 전역을 포괄하는 국가적인 상징은 아닐지라도 스페인 문화의 중요한 일부이며 이 나라 국민의 정서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임을 분명하다. 20세기 전반기 스페인의 유명한 철학자인 호세 오르떼가 이 가셋은 “투우를 배제하고 스페인 역사를 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 이라고 언급한 바 있으며 투우의 모티브는 고야와 피카소의 그림이나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의 시 속에서 여전히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란의 여부를 떠나 관광산업적인 측면에서 볼 대 투우와 플라멩꼬가 스페인의 외화획득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이 두 민속 ‘상품’이 없다면 스페인 관광의 매력은 상당부분 감소될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투우는 스페인을 방문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경기가 아니며 통상 축제 기간이 아니면 마치 프로축구 경기처럼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3월에서 10월까지만 열린다. 따라서 일정상 투우를 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외국인 관광객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시즌 중에는 웃돈을 지불하고서라도 관람하고자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플라멩꼬의 경우,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와 같은 전국 대도시와 안달루시아의 주요 도시들에 있는 따블라오 (플라멩꼬 공연장)에서 거의 연중무휴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투우가 동물 학대 행위이며 플라멩꼬가 단순한 ‘쇼’ 로 전락했다는 일부의 따가운 시선도 관광객들이 서슴없이 풀어헤치는 지갑 앞에서는 무색해지고 만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스페인 사람들은 투우와 플라멩꼬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을 비난만 할 일이 아닌 것이다.



투우

투우의 기원에 대해서는 제천의식절이나 수렵기원설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혹자는 황소와의 대결을 거쳐야 어른으로 인정받았던 청동기시대의 성인식에서 찾기도 한다. 황소와의 싸움이 제례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볼거리로서 처음 자리 잡게 된 것은 아무래도 원형경기장이 만들어진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인데 이때는 기독교인의 처형이나 검투사와의 대결에서 황소를 이용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맹수와 검투사의 대결을 금지하기 시작하면서 로마에서는 투우도 사라졌지만 용맹한 이베리아 황소의 서식지였던 스페인에서는 계속 존속되었다. 중세로 접어들어 투우는 주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나 축제 때 행해졌으며 11세기 스페인의 영웅이었던 엘 시드가 투우의 애호가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 16세기에 이르러 투우는 귀족들의 스포츠로서 자리잡게 되나,18세기에 이르러 투우는 귀족들의 전유물에서 일반 민중들의 관심사로 바뀌게 되며 그 형식 또한 이제까지의 말을 타고 하던 투우에서 직접 투우사가 땅으로 내려와 소와 대결하는 오늘날의 형식으로 전환된다 . 18세기 안달루시아 론다 출신의 프란시스코 로메로가 투우와 경기할 때 쓰는 붉은 색 천인 물레따(muleta)를 처음 고안하여 황소와 일대일의 정면대결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투우의 규칙들은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정비되었다.

투우 경기는 통상 석양 노을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오후에 시작된다. 경기는 3팀의 투우사 그룹이 등장하여 각각 두 마리씩 6마리의 소를 상대로 하며, 마리당 20분에서 30분씩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전체 경기시간은 대략 두 시간 반 내외에 걸쳐 진행된다. 하나의 투우사 (torero)그룹은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처음 등장하는 투우사는 말을 타고 나와 긴 창으로 소에게 상처를 입혀 소의 역량을 시험해 보고 반응을 살피는 2명의 장창잡이(picador)이며 이어서 날렵한 동작으로 소의 등에 두 개씩의 짧은 창을 찔러 소를 극도로 흥분시키는 역할을 하는 3명의 단창잡이 (banderillero)가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붉은 천으로 된 물레따를 사용하여 소와 혼연일체의 유희를 펼치며 긴 칼로 소의 숨통을 끊는 1명의 주인공 투우사(matador)가 있다.

한 마리의 소와 대결하는 시간은 이들 세 부류의 투우사들이 등장하는 단계에 따라 각각 장창꽂이 (Suerte de Varas), 단창꽂이 (Banderillas), 진실의 순간 ( El momento Supremo) 라고 부르며 그 하이라이트는 마따도르와 소의 정면 대결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단계에 있다. 능숙한 마따도르일수록 소에게 고통을 덜 주며 단숨에 소의 숨통을 끊어야 하는데 긴 칼로 흥분한 황소의 급소를 일거에 관통하는 것은 매우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일이다. 마따도르가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전 잠시 소와 시선을 교환하는 짦은 순간이 있다. 이때는 객석의 관중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이들을 응시하며 투우장에는 석양노을의 따가운 햇살과 건조한 먼지바람소리 그리고 무거운 정적과 비장한 침묵만이 감돈다.

이렇게 마무리된 하나의 세션은 객석 상단에 앉아 있는 판정관들에 의해 결과가 가려지게 되며, 우수한 투우사들은 그 판정에 따라 소의 귀를 하나나 둘 혹은 양쪽 귀와 꼬리까지 잘라가게 된다. 그리고 투우사들의 명성은 그 해에 얻은 이 전리품의 숫자에 따라 결정된다.



플라멩꼬

플라멩꼬의 독특한 선율과 분위기는 스페인 남부 지방을 거쳐 갔던 여러 민족들의 정서가 농축되어 빚어진 것이다. 이 음악에 대한 최초의 문헌상의 기록은 1774년 호세 까달소의 ‘모로코의 편지’에 나타나지만 그 기원은 훨씬 오래된 것이다. 일부에서는 플라멩꼬의 시작을 과달끼비르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이베리아의 고대 문명인 따르떼소 족에게서 찾기도 하며 안달루시아를 거쳐 갔던 모든 민족들 –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유대인, 이슬람인, 고트족, 집시- 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교적 신빙성 있는 주장은 플라멩꼬가 회교도들의 스페인 정복 시절 북아프리카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은 안달루시 음악 (música Andalusí) 에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의 음악적 요소가 가미되어 생성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플라멩꼬의 춤 동작이나 음악적인 리듬이 원래 집시들의 고향이었던 인도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15세기를 전후로 스페인어에 유입된 집시의 영향이 가미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플라멩꼬는 춤과 음악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음악은 비록 타악기나 손뼉치기와 같은 부수적인 요소들도 가미되지만 기본적으로는 깐떼(Cante) 라 불리우는 노래와 기타 연주가 근본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춤은 발과 다리, 허리 , 팔, 손, 손가락, 어깨와 머리 등 전신의 부위를 모두 조화롭게 사용하므로 그 표현이 매우 풍부할 수밖에 없다. 플라멩꼬는 크게 ‘플라멩꼬 혼도 ( Flamenco Jondo) ’ 와 ‘플라멩꼬 페스테로 (Flamenco Festero)’ 로 나누어지는데, 전자가 사랑, 환멸, 고통 등의 우수에 찬 주제를 어둡고 슬픈 감정을 담아 표현하는 반면 후자는 축제 분위기의 밝고 경쾌하며 때로는 코믹하기까지 한 내용을 다룬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플라멩꼬는 전자의 것이다.

플라멩꼬의 전성기는 1860년에서 1910년까지 소위 ‘플라멩꼬의 황금시대’였는데 이때는 춤이 중심이었으며 주로 카페에서 공연되었다. 1910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는 ‘플라멩꼬 오페라’의 시기로 경쾌한 노래가 중심이 되나 이러한 경향은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해 스페인의 27세대 예술가들은 진정한 ‘깐떼혼도(심오한 노래)’ 를 육성하기 위해 그라나다에서 경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로는 ‘플라멩꼬의 르네상스’시기인데 19세기 플라멩꼬 카페의 후신인 따블라오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극장과 같은 일반 공연 무대로도 확산되었다. 기타 또한 예전과 달리 독자적인 장르로도 독립하여 빠꼬 데 루시아와 같은 유명한 플라멩꼬 기타리스트를 배출하게 된다.

오늘날 플라멩꼬의 중심지는 여전히 안달루시아지만 마치 재즈가 더 이상 뉴올리언즈만의 음악이 아니듯이 지역적 색채를 뛰어 넘어 국제화되었다. 이제 플라멩꼬는 다른 음악장르와의 퓨전은 물론 일본인들에게까지 전수될 만큼 전 대륙으로 확산되어 스페인 남부의 전통적인 정서를 세계인들에게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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